동네의 기원을 물으면 보통 개척과 번영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다오청은 다르다. 이 거리는 싸움에서 진 사람들이 밀려난 끝에 도착한 자리에서 시작됐다.
부두를 둘러싼 충돌
1853년, 오늘날의 완화(艋舺)에서 정하교병(頂下郊拚)이라 불리는 집단 충돌이 일어났다 사실. 먼저 들어와 부두를 장악한 취안저우 삼읍(三邑) 세력이 지나는 상선에 통행 부담을 지웠고, 이것이 퉁안 계열 상인의 이권을 압박하면서 갈등이 누적됐다 사실. 신앙의 차이까지 겹쳐 결국 대규모 충돌로 터졌고, 이는 타이베이 서부 역사에서 손꼽히는 사건으로 남았다 사실.
두 번 거절당한 이주
패한 쪽의 이동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먼저 북쪽 다룽퉁으로 향했지만 그곳 정착민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다시 단수이강을 따라 내려와 다다오청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당을 세우고 시장을 열고 해협 무역에 나섰다 사실. 강변이라는 조건이 결정적이었다 — 배를 댈 수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추정.
그보다 앞선 세 칸
다만 다다오청이 완전한 빈 땅은 아니었다. 1851년, 이주 상인 린란톈(林藍田)이 해적을 피해 지룽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남방식 점포 세 칸을 지었고, 이것이 다다오청 최초의 상점으로 전한다 사실. 즉 1851년의 씨앗 위에 1853년의 대규모 이주가 얹히면서 상권이 폭발한 셈이다 추정.
패배가 남긴 구조
이 층은 오늘의 거리 모양에도 남아 있다. 다다오청은 처음부터 강을 향해 조직된 동네다 — 부두에서 물건을 내려 거리 안쪽으로 밀어 넣는 구조이고, 그래서 디화제의 상가 건물들은 좁고 길게 안으로 파고드는 평면을 갖는다(4화) 추정. 밀려난 사람들이 택한 조건이 거리의 문법이 된 것이다.